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셀틱 FC/역사 (문단 편집) == 윌리 말리의 시대(1897~1940)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Willie Maley.png|width=100%]]}}}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018749 0%, #018749)" '''{{{#!html 셀틱의 기틀을 마련한 윌리 말리}}}'''}}} || 1897년, 셀틱은 유한회사로 운영하게 되었고 [[윌리 말리]]가 구단의 첫 정식 감독이 되었다. 말리는 초반에 경험이 있는 선수들을 위주로 영입했고, 어린 선수들은 주니어 팀에서 육성하는 방향으로 잡았다. 말리의 이러한 운영으로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6번 연속 리그 우승을 거두며 20세기 초반 10년을 셀틱의 시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1907년과 1908년에 셀틱은 스코티시 컵도 우승을 거두었는데, 당시 2연속 스코티시 컵 우승을 한 것은 셀틱이 처음이었다. 이 기간 동안 알렉 맥네어, 지미 퀸, 짐 영, 피터 소머스, 알렉 베넷, 데이비 해밀턴, 지미 맥메너미 그리고 데이비 아담스와 같은 선수들이 셀틱의 중추 역할을 했다. 환상적인 10년을 보낸 후 몇몇 선수들은 은퇴를 하거나 다른 클럽으로 이적을 하였다. 이 때문에 1911년에서 1913년에 라이벌인 레인저스가 3회 연속 리그 우승을 거두면서 리그에서는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코티시 컵에서는 1911년 [[해밀턴 아카데미컬 FC]], 1912년 클라이드, 1914년 히버니언을 결승에서 꺾으며 계속해서 성공을 이어나갔다. 당시 짐 영은 큰 덩치로 힘을 보여주며 측면의 지배자였고, 체격이 작았던 팻시 갤러허는 신명나는 기술로 자신의 왜소한 체격을 커버했다. 피터 존스톤, 앤디 맥아티, 맥네어 그리고 맥메너미와 같은 경험 많은 선수들에 팻시 갤러허의 가세로 더욱 강력해진 셀틱은 1914년 4월 말에 리그 제패 후 3년 연속 리그 우승과 컵대회까지 두 번 우승했다. 셀틱은 191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페렌츠바로시 베이스[* 부다페스트 컵이라고도 불림, 당시 작은 유럽대항전]에서 우승했다. 당시 결승에서 [[번리 FC]]와 맞붙었는데, 대회 주최 측과 참가 팀들은 이긴 팀에게 트로피를 주겠다고 합의했지만 셀틱과 번리는 연장전을 거부했다. 셀틱은 이미 [[글래스고]]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부다페스트에서 재경기를 치를 수 없었다. 그래서 대회 측은 동전 던지기를 통해 번리의 홈에서 재경기를 치르기로 했고, 셀틱은 잉글랜드로 건너가 재경기를 치러 2:0 승리를 거두며 우승팀이 되었다. 이때 셀틱은 트로피가 당시 전쟁 자금을 모으기 위해 판매되었기 때문에 수여 받지 못했고, 우승 상금의 일부를 헝가리 자선 단체에 기부하기도 했다. 이후 74년 뒤인 1988년에 셀틱 창단 100주년을 맞이해 페렌츠바로시는 수여하지 못했던 트로피를 수여하기도 했다. 1914년 대회 당시 트로피 모양이었던 [[백자]]를 제작해 글래스고로 가져왔고, 1988년 4월에 열린 [[던디 FC]]와의 우승이 결정되었던 경기에 선보여졌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셀틱은 네 번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15년 11월 20일부터 1917년 4월 14일까지 62경기 무패 기록을 달성하게 되었고, 이 기록은 2017년 셀틱이 깰 때까지 100년 가량 깨지지 않았던 기록이다. 이 기간 동안 경기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셀틱이지만 외적으로는 큰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관중 수가 급격히 줄었고, 선수의 연봉 또한 줄었으며, 고정 선수 명단을 제출하라는 압력도 존재했다. 1916년 어느 날은 하루에 [[레이스 로버스 FC]]와 [[머더웰 FC]]와 두 경기를 치르는 날도 있었다. 경기는 각각 6:0, 3:1로 승리를 거뒀다. 축구 경기를 치르기 위해 선수 선발전을 개최하기도 했고, 어느 날엔 셀틱 파크에서 [[참호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몇 몇 셀틱 선수들은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2군 팀 선수였던 윌리엄 앵거스는 열심히 싸워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셀틱에서 200경기 이상 출장했었고, 팬들에게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피터 존스톤은 1917년 [[솜 전투]]에서 사망하기도 했다. 또한 1915년 4월 17일에 셀틱 창단에 큰 공헌을 한 왈프리드 수사가 사망했고, 그는 덤프리스에 있는 마리스트 묘지에 묻혔다. 이에 말리는 주주들에게 보낸 연례 보고서에 왈프리드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며 “그는 셀틱의 창립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라고 말했고, 그의 셀틱의 대한 공헌에 대해 “진정으로 클럽을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까지 레인저스가 스코틀랜드 축구를 지배했다. 셀틱이 1920년대에 두 번 우승하는 동안 레인저스는 8번의 리그 타이틀을 가져갔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셀틱은 스코티시 컵에서 3번의 타이틀을 가져가며 성공을 이어갔다. 1925년에 거두었던 스코티시 컵 우승이 많은 이들에게 인상을 주었다. [[햄던 파크]]에서 준결승전이 열렸고, 상대는 라이벌인 레인저스였으며, 당시 들어온 10만 관중 앞에서 5:0 대승을 거두며 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4월 11일에 열린 던디와의 결승전에서 2:1로 승리를 거두며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Jimmy McGrory.jpg|width=100%]]}}}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018749 0%, #018749)" '''{{{#!html 셀틱 최다 득점자 지미 맥그로리}}}'''}}} || 1920년대 중반 [[지미 맥그로리]]는 스코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그는 1923-24 시즌에 클라이드뱅크에서 넣은 16골을 포함해 16년 동안 550골을 집어넣었다. 1926-27 시즌에 리그와 컵대회에서 넣은 골이 무려 57골이었다. 그리고 1928년 1월에 열린 던펌린과의 경기에서 셀틱은 8골을 넣었는데 모두 맥그로리가 기록했다. 1928년에 [[아스날 FC]]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당시에 엄청난 액수를 제시했고, 셀틱은 그를 매각하려고 했으나, 맥그로리는 셀틱을 떠나고 싶지 않아했고, 셀틱에 잔류했다. 후에 맥그로리는 “아스날에서의 맥그로리는 셀틱에서의 맥그로리 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931년 9월, 셀틱은 올드 펌 더비 도중 골키퍼인 존 톰슨이 사망하는 끔찍한 사고를 경험하기도 했다. 톰슨은 볼을 잡아내기 위해 레인저스의 선수였던 샘 잉글리시의 발 아래로 향했고, 이에 톰슨은 두개골 골절을 당했고, 병원으로 향했지만 그 날 저녁 사망했다. 톰슨의 나이는 겨우 22세였지만 1927년 18세의 나이로 데뷔하여 200경기 이상을 뛴 경험이 풍부한 선수였다. 짧은 기간 선수 생활을 했지만 그의 동료들과 상대팀 선수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았고,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훌륭한 골키퍼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그는 후에 휴 테일러의 책인 ‘스코틀랜드 축구의 달인(1967)’에서 ‘골키퍼 왕자’로 언급되는데 이 별명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코틀랜드 파이프의 카덴덴에서 열린 톰슨의 장례식에 약 3만 명 가량이 조문에 참석했다. 이 사고와 연관되어 있던 샘 잉글리시는 스코틀랜드의 주목 받는 젊은 선수였고, 사고에 대해 전혀 흠잡을 문제는 없었지만 1938년,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잉글랜드에서 은퇴를 하게 된다. 잉글리시는 톰슨이 죽은 후 그의 축구 경력에 대해 “7년간 전혀 즐겁게 축구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말리의 시대 동안 [[아시아]] 대륙의 선수가 처음으로 영입되기도 했는데, 1936년에 [[인도]][*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다]의 모하메드 압둘 살림을 영입했다. 그는 축구화를 신지 않고 맨발로 뛰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밀턴 에이시스와의 경기에서 1골을 기록했고, 7:1로 이긴 갈스턴과의 경기에서 동료에게 3골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비록 두 경기 모두 친선경기였지만 팬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그는 [[인도 반도]] 출신으로 유럽에서 뛰는 첫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셀틱에서 몇 달 생활했지만 주전 경쟁에서 밀려 어떠한 경기에도 출전할 수 없었고, 인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셀틱은 1930년대 중반에 지미 델라니, 조니 크럼, 윌리 부찬, 존 다이버스가 기존의 베테랑인 지미 맥그로리를 보완해주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셀틱은 1936년에 1926년 이후 처름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21년 이후로 처음으로 아이브록스 원정, 1926년 이후 처음으로 [[퍼 파크]] 원정에서 승리를 거뒀다. 맥그로리는 해당 시즌에 50골을 기록했다. 다음 해에 셀틱은 스코티시 컵 결승에 올랐고, 상대는 [[애버딘 FC]]였다. 그때 관중이 146,433명이 입장했는데, 이 기록은 지금까지 유럽 최다 관중수 기록이다. 셀틱은 이 경기에서 2:1로 승리를 거두며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937-38 시즌은 골든 주빌리[* 50주년] 시즌이었다. 이 역사적인 시즌에 19번째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강팀끼리 겨룬 엠파이어 엑시비션 트로피 결승에서 [[에버튼 FC]]를 꺾으며,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940년 1월에 윌리 말리는 은퇴를 발표했다. 그의 나이는 71세였고, 처음에는 셀틱의 선수로 그리고 비서 겸 감독으로 52년 간 헌신한 레전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